나 자신을 축복하라! (마태복음 22:34~40)
나 자신을 축복하라!
마태복음 22:34~40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4~40)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3서2절)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정신적이고 영적인 부분에서의 면역시스템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믿음으로 사는 우리를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게 축복을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복 받은 자라고, 나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나는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자라고 선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은 자신을 향해서 축복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내 몸을 만지면서 “몸아, 건강해라.”, 내 마음을 향해서 “용기를 가져라.” 축복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고 믿음의 사람이라고 선포해 본 적이 있습니까? 헬라 신화에 등장하는 나르시스를 기억하십니까? 연못에 비치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혹해서 그 모습과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다가 결국 물속에 빠져 죽습니다. 우리는 일종의 자기도취증에 빠진 것을 나르시시즘이라고 말합니다. 자기에게만 집착하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바로 이러한 자존심은 자기를 축복하는 자존감과는 다른 것입니다.
믿음으로 자기를 축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축복의 근원이 내게 있지 않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신념과 신앙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신념은 자기 확신입니다. 신앙은 말씀 위에 기초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은 말씀으로 나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세뇌나 자기 개발을 위한 신념과는 다른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앞에서 나를 축복하게 되면, 내가 누구인지 명백하게 알게 됩니다. 참된 자아를 깨닫게 됩니다. 그때의 자존감은 교만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겸손해지며, 내 이웃도 소중한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이에 ‘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구약의 십계명을 두 계명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태복음 22:37∼39)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이에 ‘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내가 주체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내가 주체입니다. 사랑하는 그 중심에 내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 자신같이 네 이웃을 사랑해라. 네가 너 자신을 미워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네가 너를 조롱하면 네가 다른 사람도 무시하고 멸시하게 된다.” 사랑하되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즉 자기를 소중히 여기고 나의 나됨을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남도 귀한 존재인 줄 알고 그의 인격도 존중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지금도 사랑하시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사랑하시는구나. 변함없이 사랑 하십니다 ’하나님 때문에 겸손해질 수 있도록 하나님을 믿게 하신 것입니다. “너를 만드신 창조주가 있다. 너는 피조물이다. 너보다 크신 분이 계신다.” 우리는 이것을 예배드릴 때마다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한계를 느끼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아무리 잘나가도 하나님 앞에 서면 부끄럽고 연약한 존재임을 확인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겸손히 살아야 되겠다고, 교만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너는 이 땅에 유일무이한 존재다. 하늘과 땅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복된 존재, 소중한 존재가 바로 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존재이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치시면서 “나도 너에게 복을 주었으니 너도 너 자신을 축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나’입니다. 기독교는 인간 중심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를 신중심이라고 생각하다 보면, 하나님을 인간을 억압하고 조정하시는 분으로 오해합니다.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만큼 인간을 귀히 여기시는 분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을 향해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말하는 종교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들이신 예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향해 “너희는 내 친구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내 생명을 버렸다”고 말하는 종교나 철학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축복의 근원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걱정과 근심, 절망, 탄식, 죄와 허물, 질병, 죽음의 공포 이 모든 것을 대신 지시고 고통 받는 인간들과 연대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아니십니까? 그분의 고난 속에 우리의 열등감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눈물이 들어 있고, 우리 삶의 모든 탄식들이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위한 종교입니다.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인간에게 생명을 주고, 인간을 진리로 이끌어가는 종교입니다. 어떤 종교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신음하는 자들, 두려워하는 자들을 향한 새 생명의 표지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것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라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인간의 자리에, 이 낮은 자리에 찾아오셔서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한 사람을 어디서 만나보셨습니까? 예수님처럼 고난당하고 죄인 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를 그렇게 열망한 분을 우리가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가장 기본적인 관심이자 가장 큰 관심은 바로 여러분과 저와 같은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까?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자가 예배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절대적인 표준입니다. 이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선포할 수 있습니다. 내 시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내 몸을 만지면서 건강을 달라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셔야 합니다. 마음에 근심과 걱정이 가득하면, 손을 가슴에 대고 나를 향해서 축복하셔야 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냐.’ 말씀하셔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면서, 나의 근심과 걱정을 주님께 모두 맡기면서 축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있지 않습니까? 수많은 스트레스 속에서 어찌할 줄 몰라 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는 것이 인생 아닙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는 먼저 나 자신을 향해서 하나님의 정의의 잣대를 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향해 잣대를 대기 전에 내가 먼저 대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먼저 비판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보다 더 날카롭고 엄정하게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자주 실수를 하는지, 내가 얼마나 죄와 정욕에 붙들려 있는지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 로마서 7장을 보면 .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 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 (로마서 7:19)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 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4) 스스로를 건져내 보려고 애를 썼지만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 죄악이 있고, 부정함과 결함이 있고, 시간과 공간의 한계가 있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그것을 정확히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 긍휼, 사랑의 잣대를 대야 합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 같은 자를 용서해 주셨구나. 내 죄의 짐을 주님께서 대신 지셨구나. 나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셨구나. 나를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딸로 만드셨구나.’ 이렇게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면서 나도 나를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셨는데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교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셨는데 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십니까? 스스로를 용서하고, 위로하고, 격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 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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