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설교

순종하는 믿음 축복받자

본문말씀 : 창 22:1-14    설교자 : 이승남목사    설교일자 : 2015-02-22    작성일 15-02-17 13:36

아브라함이 왜 우리의 신앙의 조상이라는 말을 듣습니까?

그것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실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하나님의 명령 따라 모리아 산으로 가서 제물로 드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을 듣고 읽을 때, 머-언 전설이나, 동화의 세계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이요, 현실적으로 나와는 아무러한 관계가 없는 말로 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성도된 우리들이 이 말씀을 수 없이 반복해서 읽고도 아브라함과 같은 축복을 받지 못하고 있지 않는지.....생각해 보게 됩니다.

복(福)이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이 참으로 귀한 복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갖지 못하는 복을 가질 때, 그것이 값진 복인 줄 믿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평범한 믿음이기에, 평범한 은혜에 만족하면서 사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아브라함은 우리와는 달랐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드린다고 하지만, 최선의 것으로 하지 아니하고, 차선(次善)의것으로 하고, 최고(最高)의 것으로 하지 아니하고 평범한 것을 드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아니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는 최선의 것으로 하지만, 하나님께는 차선의 것으로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가장 귀한 것은 뒤에 두고, 하나님께는 인색한 마음으로 드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들에게는 아까운 것 없이 쓰지만,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에는 언제나 뒤쳐집니다. 이것이 아브라함과 다른 점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자기의 생명 보다 더 귀한 아들을 드렸습니다.

아들을 제물로 받친 사람이 있다면, 그 이상 더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그러기에 아브라함이 신앙의 조상이 될 만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필칭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산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보면, 인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결국 자기에게 되돌아오건만,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를 못합니다. 마치 욕심꾸러기 어린애처럼 자기 손안에 쥔 것을 놓지를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더 좋은 것을 얻지 못하는 형편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구할 때는, 우리에게 더 큰 것을 주시기 위하여,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도록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은 구체적인 행위 속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설교를 많이 듣고, 교회에 오랫동안 나왔다고 다 순종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니, 생각으로는 얼마든지 순종할 수 있습니다.머리로는 얼마든지 순종하겠다고 합니다.

입술로는 얼마든지 순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말 못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 누가 모릅니까?

또 말씀대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 누가 모릅니까?

다 알면서도 못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못하는 것을 아브라함은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이 우리와는 무엇이 다른 사람입니까?

그도 우리처럼, 인간이었습니다.

그에게도 부모가 있었고, 그도 고향이 있었고, 일가친척이 있었습니다.

그도 하루 세끼 밥을 먹어야 하는 사람이었고, 가정을 이룬 가장이었습니다.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라고 했을 때 떠났습니다.아예 생활 기반을 뒤흔들어 놓는 명령이었습니다.

어딜 가서, 무엇을 해야 밥을 먹을까?

고향을 떠나, 아버지의 가업을 떠나, 어디인지도 모르는 정처 없이 가라고 했으니, 그렇게 명령하는 하나님이나, 그것을 그대로 믿고 따라 나서는 아브라함이나,

모두 대단한 분들입니다. 아마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선민의 조상을 삼으려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라면, 내 말을 순종하겠지....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신앙은 사상(思想)도 이론(理論)도 웅변(雄辯)도 아니고 행위(行爲) 그 자체입니다. 즉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가 신앙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행위 없는 신앙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약2:17)

믿음에는 <아무것도 아닌 믿음>, 과 <죽은 믿음>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산을 옮길 만한 믿음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으니, 아무것도 아닌 믿음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고, 야고보서 2장에 보면,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으니, 죽은 믿음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고 하다 보니, 거기에 무슨 기적을 체험할 수 있으며, 죽은 믿음을 가지고 아무리 중언부언해 보아야 무슨 응답의 체험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아브라함처럼, 구체적 행위 속에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일컬어 ?계약서?(testament)라고 합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작성된 <계약서>란 말입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이라고 합니다.

계약을 맺으면, 그대로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집매매 계약을 했건, 토지 매매 계약을 했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혼인의 계약을 맺었건, 계약은 실천하는데 의의가 있습니다.그러기에 성경을 대하는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약속의 계약입니다.

그래서 반신반의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시키려고 맺은 이 계약을 한번도 변함없이 초지일관(初志一貫) 지켜 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속사(救贖史)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받친 것처럼,

하나님은 독생자 외아들을 제물로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었습니다.

아들을 내어 준 희생처럼 더 큰 희생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드린다고 하면서도 솔직히 인색한 마음으로 드리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어떤 곳에 예수를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추수 감사 주일이 되어, 교회에서 목사님이 일주 일전에 광고를 합니다.

다음 주일은 추수 간사 주일이니, 일년 동안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의 예물을 드리자고.....그래서 이 사람이 한 주일 동안 얼마를 작정할까? 라고 생각하면서 그 주간 내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속으로 한 1억쯤 드리겠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10여년전에 사 놓았던 땅값이 몇100절이 뛰어 가만히 앉아서도 앞으로 수10억원의 값이 나가게 되었으니,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렇게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으로 작정을 해 놓고 보니, 다른 교인들의 얼굴이 떠 오릅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데 장로님들은 얼마를 할까?

아무개 집사님은 얼마를 할까? 그러구보니, 내가 너무 많이 하는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반으로 줄였습니다. ‘한 5천만원만 하지......그래도 내가 제일 많이 드리는지도 몰라’라고... 그러구 생각하니, 5천만원도 또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2천만원만 드리지.... 2천만원 드려도 결코 작은것은 아닐꺼야.....이렇게 자꾸남 생각이 들어, 결국 주일날 하나님께 드린것은 불과 100만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결국 이 사람은 하나님께로 부터 어떤 취급을 받으리라고 생각 하십니까? 뻔한 이치입니다. 그런 믿음속에 무슨 기적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머리로는 뻔히 알면서도, 그리고 입술로는 감사하면서도, 행위 속에 순종하는 믿음들이 부족합니다. 오늘의 필요한 믿음은 어떤 믿음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의 신앙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우리의 자녀들을 드릴 수는 없다고 해도, 자녀들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가정의 우상들이 자녀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 보다 더 정성을 다하고, 하나님 보다 더 그들에게 비위를 맞추며, 그들에게 쏟는 정성이 대단합니다. 특히 우리네 부모님들의 자식 사랑은 유별납니다. 자식들에게는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모두들 열심히 저축하고 벌었습니다. 그러는동안, 세상 공부, 세상 학교만 관심을 가졌지, 신앙 교육을 시키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오늘의 현상이 무엇입니까? 재물 때문에 형제간에 불화만 조성해 놓은 가정들이 없지 아니합니까? 자식 귀엽다고, 해달라는대로 다해 주었더니, 주일성수못하는 자녀들로 키우지는 아니했는지?.....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3. 그러면 아브라함에게서 본받을 신앙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이레의 신앙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값싼 행위 속에 욕심 많은 은혜를 바랄 때가 많습니다.

무엇 조금 하나님께 드리고는 10배 이상 받기를 원합니다.

십일조를 바로 그런 정신으로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열의 하나를 드리면, 그 이상 10배로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그것은 흥정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고, 헌금과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을 구별 되이 드리는 신앙의 행위일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가장 귀중한 아들을 하나님께 드렸는데, 그런 신앙적 행위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여호와 이레?의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실 것이다”라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야말로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만이, 뿌리가 걸린 수양을 발견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려고 해도,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버리지 않는 한 줄 수가 없습니다. 손을 비워야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겠는데,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 용납을 못합니다. 창세기 6장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하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육(肉)의 사람들이 되었기에 영(靈)의 세계를 볼 수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은혜는 육(肉)의 합리적 생각으로는 볼 수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육의 사람들은 지금 자기 손에 잡힌 것만 봅니다. 그것을 버리면, 더 큰 은혜가 주어지는데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원시(遠視)치 못합니다. 그러므로 참 신앙은 그렇게 값싸게 주어지는 덤핑 은혜가 아니라, 시련의 모리아산을 올라가는 3일 길의 고민과 갈등을 거친 최후의 결단의 용기 속에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그런 믿음 위에 반드시 ?여호와 이레?, 즉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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